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틴아메리카 근현대사 (문단 편집) === 식민 잔재 철폐와 토지개혁 실패 === 북쪽의 이웃한 [[앵글로아메리카]]의 [[미국]]이 초강대국이 된 이유에는 인종(영국계/독일계), 종교(개신교) 같은 요인보다는, '''유럽/아시아와 다르게 전통 기득권층(토지귀족, 관료화된 성직자 계급)이 없었던 사회적 요인,[* 이러한 환경이 미국 특유의 [[반지성주의]]를 일으키는 부작용을 불러오기도 했으나 경제와 사회 발전 면에서는 긍정적인 효과가 매우 컸다.] 이용 가능한 토지가 사실상 무한대였던 지리적/경제적 요인이 더 컸다.''' 미국의 경우 갈려나간 [[아메리카 원주민]]을 제외하면 사실상 무주공산이었고, 토지귀족에 그나마 가까웠던 남부 지주들은 [[남북전쟁]] 이후 갈려나갔다.[* 물론 여기에는 이들에 대항할 수 있던 세력도 있음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애초에 미국은 크게 보면 남부와 북부라는 2개의 세력을 이루고 있었고 상공업과 교육, 자영농에 기반한 북부가 남부와는 독자적으로 발전하면서 그래도 남부의 지주에 대항할 세력을 만들었고 이들이 결국 남북전쟁에서 이겨 남부 지주들을 몰락시킨다.] 그리고 홈스테드 법이 제정되어 미개발 토지를 무상으로 제공받았다.[* 물론 이 과정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대거 학살당했지만 이 점은 남북아메리카 모두 다를 바 없었다. 그나마 라틴아메리카는 메스티소라는 원주민 혈통이 어느정도 인구를 가졌지만 북미의 원주민들은 그런것도 아니다.] 반면 라틴 아메리카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이던 시절 유럽의 전통적 기득권 체계(토지귀족, 관료화된 성직자 계급)가 그대로 넘어왔다.[* 물론 성직자 계급은 미국의 주류종교(개신교)와 남미의 주류종교(가톨릭)이 다르다는 점이 한몫 했지만 미국도 [[세일럼 마녀 재판]] 시기만 해도 관료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목사들이 할거하여 종교왕국 비슷하게 있었다. 허나 세일럼 마녀 재판부터가 이런 신정주의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있던 때에 마녀재판이라는 카드로 다시 회귀하려는 코튼 매더 목사의 선택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기에 남미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건국의 아버지들]]은 상당수가 [[프리메이슨]] [[이신론]]자인 등, 그다지 신실하지 않은 이들도 많았다.] 게다가 유럽보다 더 견고한 [[피부색차별|인종에 기반한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카스트 제도]](La Casta)가 확립되면서 산업혁명 이후에도 "백인 > 메스티소 > 원주민 > 흑인" 사회 구조가 고착화되었다.[* 그나마도 식민지 시절에는 피부색보다는 종교를 더욱 중시한 (즉,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원칙적으로는 원주민도 신민으로 받아주는) 본국 정부에 의해서 이런 차별이 어느정도 자정되기라도 했지 독랩해서 본국 정부마저 없어지고 현지 백인들이 완전히 권력을 잡게 되자 이런 경향이 더 심해졌다.] [[페닌술라르]]의 크리오요 차별에 분개하여 들고 일어난 크리오요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흑인과 원주민들을 소외시켰으며, 식민지 시절 주어진 특권을 이용하여 족벌 기득권 체계를 구축하는데 열심히였다. 비교하자면 19세기 당시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독립국들은 서로 영토를 노리고 전쟁을 벌이기 일쑤였다면, 미국과 캐나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국방 문제 하나만큼은 서로 완전히 협력하는 상황이었다. 즉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국가들의 지도층들의 멘탈리티는 민주주의 국가의 리더보다는 [[군벌]]에 가까웠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원이 아무리 남아돌아도 효율적으로 활용되기 어렵다. 근본적인 사회 구조가 이 모양인데 당연히 좌파가 집권해 국유화와 복지를 하건, 우파가 집권해 경제개방과 민영화를 하건 무언가가 나아질 턱이 없다.[* 중남미 정치 세력들의 경제 정책을 비판하던가 라틴아메리카 사례를 국내에 적용해야 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좌파 정책이건 우파 정책이건 중남미에서는 그 정책 자체보다는 대지주 위주의 기득권 사회구조가 개선되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킨 경우가 많다.] 인종차별 구도는 확고했는데 그렇다고 유럽계 백인 인구라도 활용을 잘 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 [[대서양]] 횡단 배편이 저렴해지고 의료 기술의 발달로 사망률이 감소하자 유럽에서 미국/캐나다로 대량이민이 일어나던 시점에서도 라틴아메리카로 이주한 유럽인 인구는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했다. 1백여 년이 넘는 기간동안 600만여 명이 유럽에서 라틴아메리카로 넘어갔는데 그 중 절반이 아르헨티나로 갔고 나머지는 브라질, 우루과이, 쿠바로 향했다. 물론 600만 명이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비슷한 기간(1850~1930년대)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민한 인구는 2,500만여 명이에 달했다. 즉 당시 유럽 백인들 입장에서도 라틴아메리카는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 같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미국/캐나다만 못한 곳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럴만도 한게 앞서 보듯 미국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몰아낼 수 있다면) 땅을 공짜로 주었고 그렇기에 지주에게 시달리면 그냥 멀리 이주해서 농부가 되면 그만이다. 그나마도 지주들도 남북전쟁 이후 몰락하고...(그리고 지주들이 있던 시기에는 남부보다 북부에 이민자가 더 많았다.) 즉 미국은 이민자가 선택할 길이 중남미에 비해 더 많았다. 캐나다는 추워서 미국보다 입지는 적지만 그래도 (이민자들 입장에서) 빈 땅은 많았다. 반면에 미국에 맞먹을 정도로 넒은 브라질은 의외로 농업에 불리한 땅이 대부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